MIT(Manukau Institute of Technology) 요리학과에서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아담한 체구의 교수(Lecturer) 한유진씨. 2001년도에 뉴질랜드로 와서 MIT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기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처음엔 단지 그녀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경험을 쌓기 위해 뉴질랜드로 왔었다. 그러다 점점 뉴질랜드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고 정착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요리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고, 우연히 레스토랑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요리의 매력에 빠져 당장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오늘의 유진씨가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뉴질랜드 

처음부터 한유진 씨가 요리를 전공한 것은 아니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요리와는 상관이 없는 학과를 다니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 여겨 중간에 그만 두었다. 뉴질랜드도 요리를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점점 뉴질랜드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정착하고픈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자녀 교유 환경을 고려해도 뉴질랜드가 안정적이고, 어떤 직업을 가질 때 나이 학벌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그리 크지 않은 아라가 이곳 뉴질랜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AUT에 호텔 경영학과를 들어 갔으나 이 역시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공부를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주방에서 일을 하다 셰프들이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요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Culinary Art로 학과를 바꾸게 되었다.  

한유진 씨가 처음 주방에 발을 디딘 곳은 하윅에 있는 한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 곳이기도 하다. 사실 요리를 시작하려고 레스토랑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하다 보니 요리가 하고 싶어졌고 요리사로서의 꿈도 키우게 됐다. 그저 그런 뻔한 스토리 같지만 어깨 너머로 본 쉐프의 세계에서 묘한 매력을 느꼈다고 할까.  

다양한 곳에서 일을 하다 졸업을 앞두고 스카이시티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 그 곳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게 되었다.  

Both the burden and the sharing are in the eye of the

영주권 

유진씨는 영주권도 다소 쉽게 딴 케이스다. 졸업 전부터 스카이시티라는 큰 회사에서 일을 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졸업 후에 잡써치비자를 거치지 않고 워크비자로 바로 들어 갈 수 있었다. 학교 졸업 전에 일을 시작했고 영주권 신청 당시에 운 좋게 승진을 해서 그 조건이 영주권 심사기준에 맞아 영주권도 수월하게 땄다. 큰 회사이다 보니 여러 가지 써포트도 많았고 이민성에서도 믿을 수 있는 회사라 더욱 신뢰를 가지고 심사를 한 것 같다고 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유진씨는 후배들에게 항상 학교 다닐 때부터 일을 시작하라고 조언을 한다. 그래야 졸업 후의 과정이 수월해진다고. 

Sous Chef 

그녀는 스카이시티 레스토랑에서 동양여성 최초의 Sous Chef(부주방장)로 일했다. 그러나 아무리 다민족국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뉴질랜드라 할지라도 체구도 작은 동양인이, 남자들이 다수인 주방에서 그것도 여성이 Sous Chef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치열한 경쟁은 물론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때론 시기 어린 오해들로 상처를 입기도 했다. 

MIT 

요리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가르치는 일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일을 하다 매니저 레벨이 되면 스탭 트레이닝을 시키는 업무도 한다. 당시 그녀는 그 트레이닝 시키는 것에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아주 잠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요리사마다 다르지만 한군데에서 5년, 10년 일하는 사람도 많다.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씨는 요리사로서 모든 분야의 일을 다 배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매 2년마다 내가 싫든 좋든 분야를 옮기자 결심했다. 이렇게 옮겨 새로운 분야의 요리를 해보는 것이 계속 도전이 돼서 좋았다고 한다.  

스카이 시티를 나와 개인 레스토랑에서 5년 동안 일하다가 다시 스카이 시티 컨벤션센터에서 근무를 하는 중에 MIT 교수로부터 MIT에서의 근무를 제안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2015년에 MIT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본격적으로 하는 강의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실전에서는 아주 엄격한,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환경에서 일을 해야 했기에 그 방식을 강의실에 그대로 적응하기에는 많은 변수가 있었다. 학생들은 요리사가 아니라 요리를 배우러 온 일반 사람들이었다. 또한 아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어느 한 기준으로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학생은 상하의 규율이 아니라 우선 인간적으로 가까워져야 했다. 또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이끌어 주어야 했다. 하나의 최고의 목표로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각각의 학생들의 목표에 맞추어 그들을 가르쳐야 했다. 

The backdrop is the difficulty that many European countries have in integrating minorities into the social mainstream”

강의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작은 체구의 동양여자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냐? 하는 편견을 갖고 있는 일부의 학생들을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지도했을 때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 교감될 때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그녀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뿌듯함이라 한다. 

가족 

한유진 씨가 요리사가 된 이후로 가장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 분은 그의 아버지다. 식품학을 전공하신데다 우리가 평소 먹는 일반적인 요리가 아닌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일에 취미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런저런 색다른 메뉴를 추천하시곤 한다. 한유진 씨는 자신이 요리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요리와는 담을 쌓고 살았을 거라 장담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의 한유진 씨가 있기까지는 아마도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녀는 2012년도에 남편 김종은씨와 결혼 했다. 당시 그녀는 이미 베테랑 요리사였고 남편은 요리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요리사 부부로서 가장 좋은 점을 말해달라는 요구에 그는 “음식을 준비하면서 손발이 척척 맞을 때”를 꼽았다. 또한 그날 레스토랑에서 서비스가 좋지 않았거나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로 인해 기분이 상한 상태로 퇴근했을 때 동병상련의 아픔을 같이 한다고 덧붙였다.  

앞으로의 계획 

“우리 학생들이 졸업 후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다양한 외식사업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지도했듯이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이끌어 나갈 것이며, 내 스스로 자기 개발을 통해 좀 더 뛰어나고 양질의 요리 기술을 학생들에게 지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최근 오래 전부터 남편과 소박한 그렇지만 음식은 소박하지 않은 꿈이었던 까페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직업을 통한 그녀의 최종 목표는 그녀의 비즈니가 잘 되어 그 안에 예비 요리사들을 위한 트레이닝 코스를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어려운 환경에 몰려 있는 예비 요리사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자 한다.  

또한, 앞으로 그녀의 비즈니스를 통해 음식으로 누군가를 돕고자 한다. 어떤 단체를 섬긴다거나 노숙자들에게 무료 음식을 제공하는 일 등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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